갓 태어난 아이가 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고
착실한 가장이 음주 운전 사고를 당하고
평생 봉사만 해온 사람이 암으로 죽는다.
누구나 이러한 개인적인 아픔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히틀러, 스탈린, 폴포트, 마오쩌둥...
대학살과 고문, 전쟁의 역사를 겪어왔다.
Q. 이러한 악을 보고도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있다면 이런 부조리한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진짜 하나님이 사랑이 많고 전지전능하다면 이런 고난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의 목적은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이다.
고통이 있은 후에야, 재난을 당한 후에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처럼
지금의 국가, 개인도 돌아온다.
하나님은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
고통이란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메가폰이다.
회개는 다시 우리를 놀라운 삶, 복된 삶으로 이끈다.
Q.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 못지 않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왜 그런가?
선한 사람이란 없다.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선하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더럽혀졌다.
우리의 선행은 이기심으로 얼룩져 있고
우리가 요구하는 정의에는 복수심이 섞여 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단지 성장이 필요한 불완전한 인간 정도가 아니라,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할 반항자다"라고 했다.
고통과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굴복하고
그리스도라는 치료제를 찾게 된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를 아는 지고의 기쁨이다.
Q. 그렇다면 고통을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을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완전히 맛보셨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후, '모두 너희 잘못이다'라고 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친히 그 속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고통이라는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친지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셨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고남과 함꼐 있어야 한다.
십자가야말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는 자리로 욥을 데려가실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행복인 것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따라서 고난을 감사해야 한다.
인생을 천국에 견주어 생각하면
불편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물을 결국은 닦아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친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옆에 함께 앉아 있어 줄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남겨 두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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