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책100권

데미안이 어렵다고? 이 영상 하나면 끝!

인생책100권 2023. 5. 1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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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인간이 되는 방법ㅣ데미안처럼 악을 추구해라

 

00. 서론

 

저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2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할아버지 때부터 공무원인 안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화목하고 어느 정도 풍족한 환경에서 온화하게 성장했습니다. 3대 째 신앙심이 강한 집안이라 이러한 가치관과 모나지 않은 성품을 가지고 삐뚤어진 적도 한번 없이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바른 청년, 선생님, 착한 아들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화목하고 풍족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교양있게 성장했습니다. 다만, 좋은 교육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면서도 학창시절에 담배와 술도 경험하고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거나 작은 상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갈등하고 사기도 당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어 더욱 다양한 일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친구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기준마다 다르고 저는 두 친구 모두가 다 좋지만, 저는 두 번째 친구의 삶이 더욱 풍성하다고 생각하고 더욱 성숙하다는 생각에 더 닮고 싶습니다.

첫번째 친구는 더 온화하고 순수해서 좋아보이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진짜 세상을 모르고, 평생 제한적인 관점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두번째 친구는 세상의 이중적인 역설성을 인정하면서,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스스로 균형있게 생각하고 자신을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에서도 두번째 친구처럼 기존에 배워오던 세상,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선한 세계와 악한 세계를 모두 아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명제를 던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균형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데미안은 1916년 1차 세계대전 중에 쓰이고, 전쟁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됐습니다. 당시 반전 작가로 독일을 반대하는 헤세에게 여러 압력이 있었고, 또 이미 유명했기에 작품성만으로 평가받고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책을 발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간되자마자 크게 성공했고 문체 분석을 통해 데미안이 헤세의 책이라는 것이 대중에게 밝혀졌습니다. 마흔 두 살의 헤세가 산전수전 다 겪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집필한 자서전격인 소설인데, 2차 세계대전, 독일군 전사자 유품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많이 발견된 책이고 그만큼 수 많은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은 20세기 가장 탁월한 성장소설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소설 제목인 데미안은 사실 주인공이 아닙니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열살에서 스무살 정도의 기간 동안 내적성장을 하도록 돕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싱클레어의 젊은 날의 방황은 곧 헤세 자신을 돌이켜보는 반성적인 시각이고, 데미안을 통해 끊임없이 각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크게 3종류의 세계에서 싱클레어가 성장하는데 1)빛의 세계, 2)어둠의 세계, 3)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의 관점에서 내적 성장을 해갑니다. 궁극적으로 헤세는 세번째,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 합니다. 이제 소설의 시간 순서대로 빛과 어둠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겠습니다.

 

01.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경험하다.

먼저, 부유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싱클레어가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소설이 시작됩니다. 싱클레어 인생의 시작은 빛의 세계였습니다. 빛의 세계란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2명이 있는 본인의 집이자 질서의 세계인데, '의무와 책임, 관용과 선의,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세상을 빛의 세계과 어둠의 세계로 나눴습니다. 어둠의 세계란 하녀와 술주정꾼, 귀신, 도살장, 쓰러진 말, 강도, 살인과 같은 것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는 분명 좋은 것들은 아니지만, 싱클레어에게 뭔가 설레고 유혹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립되는 세계를 인지하면서 싱클레어가 성장하는데, 어느날 프란츠 크로머 외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어둠의 세계에 제대로 발을 딛습니다. 본인을 과시하고 센 척을 하고 싶었던 나머지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혀 악을 덮기 위해 더 큰 악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둠의 세계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 빛의 세계에만 머무는 아버지보다 낫다는 생각도 합니다. 데미안을 통해서 카인과 아벨 사건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성경에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심에 죽인 최초의 살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벌로 카인에게 살인자의 표식이 아닌, 보호자의 표식을 이마에 주었습니다. 그 표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카인을 해치지 못하게끔 하면서 평생을 유랑하도록 한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카인이 나쁜 사람인데, 데미안은 카인이 이마의 표적을 받은 것은 사실 그가 우월했던 덕분에 신에게 받은 것이라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카인이 두려워서 맞서 싸울 수는 없지만 또 본인이 겁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표적에 대한 거짓 소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른처럼 성숙하면서도 우월하고 냉정하고, 육체적 강건함과 정신적 성숙함을 모두 갖춘 초인과 같은 데미안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중에 선한 쪽만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명제를 던져줍니다.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이상적인 것이지. 맞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있어...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허용된 반쪽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본인을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아벨처럼 살아왔다고 표현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이야기가 신성을 모독하고 상식을 깨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나는 카인이었고, 그의 표적을 단 나는, 이 표적은 치욕이 아니라고, 이건 표창이라고 함부로 상상했다.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싱클레어는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속에 아버지를 죽이는 꿈도 꾸는데, 이는 의무와 책임, 관용과 선의,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한 빛의 세계를 싱클레어가 떠난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02.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로 알을 깨고 나아가다.

 

이후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데미안이 빛의 세상과는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점차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낯선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홀로 다니면서, 불량한 친구들과 방탕하게 어울리고 악의 세계에 제대로 발을 딛습니다.

그러던 중, 키가 크고 날씬하며, 옷차림이 멋지고, 영리한 소년의 얼굴을 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소녀와 대화도 해본 적이 없고 이름도 모르지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지어가며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떨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빛의 세계를 갈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에 있을 때는 어둠의 세계를 갈망했다가, 이제 어둠의 세계에 오니 다시 빛의 세계를 갈망하는데, 이제는 한쪽에 치우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실제 이 시기에 집안을 상징하는 표시(문장)을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억지로 먹이는 꿈을 꿉니다. 그 문장이 살아서 싱클레어를 채우고 안에서부터 파먹었습니다. 이는 빛과 어둠,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세계에서 나오고 싶어함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꿈을 꾸는데, 꿈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려 데미안에게 보냈고 이렇게 답장을 받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신인데,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함께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한쪽의 세계에 편협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가라고 데미안이 답한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후에 아브락사스에 대한 꿈도 꿉니다. 어머니를 포옹했는데, 이는 어머니가 아니었고 데미안 같기도 하고 베아트리체 같기도 한데, 희열과 오싹함, 남자와 여자, 지고와 추악한 것이 섞인 것이었습니다. 실제 데미안을 쓰던 시기에 헤르만 헤세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구원은 빛, 선, 숭고함만을 추구하는 일원론적인 기독교 체계에서 벗어나 빛과 어둠, 선과 악, 정신과 육체, 숭고와 욕망을 동시에 인정하고자 하는 이원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싱클레어는 꿈에 봤었던 어머니를 만납니다. 데미안에 이끌려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난 것입니다. 에바 부인은 데미안의 육체적인 어머니이지만, 싱클레어가 꿈꾼 여인이고 아브락사스의 상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인류의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실제 에바는 영어로 이브입니다.


"그것은 내 꿈의 모습이었다. 바로 그 여성이었다. 키가 크고 거의 남자 같은 여성의 모습, 아들과 비슷한데 어머니다운 표정, 모성의 표정과 부성의 엄격한 표정, 깊은 열정의 표정을 한 아름답지만 냉정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수호자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 바로 그 모습이었다"


성경에서 이브는 인류를 죄악으로 이끌었지만, 조로아스터교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삶의 양극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완벽한 사람입니다. 에바 부인에게 존재하는 이원성은 마치 '낮과 밤이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사실 신의 동일한 뜻을 이루는 데 함께 일하고 있는 것'처럼 더욱 완전한 인간이 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03.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헤르만 헤세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과 융의 분석심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싱클레어의 정신적 성장을 상징하는 꿈이 소설에 8번이나 나옵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억압된 성적 충동(libido)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id)의 발산이고, 융에게는 자아가 주어진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나타내 보이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헤세는 데미안 이외의 작품들에서도 꿈을 통해 주인공의 내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융의 관점에서 인간의 내면은 여성 원형인 아니마(anima)와 남성 원형인 아니무스(animus)가 통합된 것인데, 그런 점에서 에바 부인도 모성적이면서 부성적입니다. 융의 <원형과 무의식>에 의하면 정신 성숙은 원형들의 통합을 통해 이뤄지고,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합할 때,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인격성숙의 이상인 자기(self)가 된다고 말합니다. 융의 분석심리학의 궁극적 목표가 이 '자기'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개성화'에 있습니다. 헤세도 이러한 관점에서 자기실현과 개성화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데미안에서 에바 부인으로 표상되는 성숙한 인간은 내면에 모성적인 것도 있고 부성적인 것도 있어야 하고,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 성숙함이란 본능과 이성, 쾌락과 고통, 자유와 책임, 안정과 모험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사랑의 기술>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아버지의 조건적인 사랑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하며, "성숙한 인간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최진석 교수님 역시 '우리가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느 한편에 선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발성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 곧 경계에 선 사람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념/개념/이론은 한쪽만 이야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립적인 상태를 포용할 수 없는데, 내가 내적 자발성의 실천자가 되겠다면, 내가 이념 속에 고정되지 않고 사건의 담당자가 되겠다면, 에바 부인처럼 양쪽을 모두 포함한 경계에 서야 합니다.

결국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을 만나는 순간, 대립하는 두 세계가 만나는 '최초의 완성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고향에 도달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내면이 도달해야 할 곳에 와 있음을 느꼈습니다.

 

04. 어떻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가?

먼저,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시절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거야. 바로 그렇기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지...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나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내 본질이 정말로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라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우리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라고도 표현합니다.

다음으로 자기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에바부인을 만나고 나서도 싱클레어는 여전히 자신의 자기완성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나타내는데, 이때 에바 부인은 2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별을 사랑한 청년의 이야기인데, 별을 너무 사랑해서 별에게 다가간 청년이 막상 별을 품에 안기 직전 의심에 빠져 결국 바다에 떨어져 죽고만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에는 비록 절망적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사랑을 성취하고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발견한 남자의 이야기 입니다. 결국 에바부인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만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종교와 신화에 박식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통해서도 아브락사스는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이 공존하는 내면을 직시하고 충실해져야 한다고 배웁니다. 나아가 개인의 성장은 "자신의 꿈과 사랑과 예감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늘어가는 것, 내면에 간직한 힘에 대한 지식이 점차 늘어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피스토리우스는 "너 스스로 생각해 내려고 애써야 해, 그러고는 정말로 네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 그걸 하면 돼.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아. 네가 너 자신을 찾아낼 수 없으면 다른 영들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자 칸트가 1784년 <베를린 월보>에,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논고를 게재 할 때도 나옵니다.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는 본인의 지성과 목소리를 사용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책에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통념이기 때문에, 라고 하며 본인의 판단을 외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이 빛의 세계고 어떤 것이 어둠의 세계인지, 무엇이 좋은 세계인지, 빛의 세계가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편견을 깨고 자기확신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05. 결론


빛과 어둠의 세계라는 도덕적인 비유로 시작했지만, 사실 데미안은 도덕뿐 아니라 여러 관점과 가치, 철학, 생각들을 한쪽의 편협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도록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균형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인간이란 에바 부인처럼 자기 내면에 있어 대립하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룬 인간입니다. 그래야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똑같은 크리스찬이라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믿었기 때문에, 환경이 그랬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신앙을 가지는 것과
똑같이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가 한번 더 분석하고 여러 종교들도 공부해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믿는 것은 성숙함에 있어 전혀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믿고 있는 것, 나의 관점을 다른 편에 서서 진지하게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얘기한 두 친구 중에 인생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경험한 두 번째 친구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포로를 돕던 헤르만 헤세는 이유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유독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같은 성장소설을 썼습니다. 총알 한 발로 삶의 종말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성 회복을 통한 평화, 나아가 아울러 전체주의에 희생되지 않고 설 수 있는 인간 정신을 추구한 것입니다.

헤세는 그의 논문인 <신학단상>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덧없고, 우리는 형성 도중이며, 우리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완벽하거나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재 상태에서 행동으로, 가능성에서 실현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참 존재에 속하게 되며,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조금이나마 닮게 되는데, 이것을 자기실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고통을 수반할 것입니다.
책 가장 처음에 나오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헤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역시나 책 속에 나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세의 말처럼 쉽지 않지만, 나만의 삶과 가치, 그리고 성숙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머물던 세상을 차고 나와야 이뤄집니다. 싱클레어가 가족의 울타리, 빛의 세계에서 나와 학교에 진학하고, 어둠의 세계에 있는 크로머를 만난 것처럼, 우리가 사회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편안하게 안주하는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카인과 아벨, 아브락사스의 예 들은 악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가 자신의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알을 깨고 고통스럽게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렵겠지만 헤르만 헤세는 이러한 성장과 자기실현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소설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결국 소설 맨 마지막에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나는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데미안과 한 몸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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