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책100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해석 및 줄거리

인생책100권 2023. 3. 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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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130페이지 밖에 안되는, 노인이 고기를 잡는 단순한 소설이 왜 이렇게 유명할까?
<노인과 바다>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인 헤밍웨이는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장도 없이 절제된 언어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단순한 이야기와 문장들을 통해 삶의 본질과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이 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2가지 큰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1. 치열함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사실 '노인'이 의미하는 것은, '나약한 육체'와 '작은 배'에 갇혀 '바다'라는 넓은 세상을 표류하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이 '바다'에는 우리가 꿈꾸는 목표, 이상향, 목적인 '고기'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노인'과 사투를 벌이는 '고기'는 '청새치'입니다. 몸길이가 4.5m, 몸무게는 900kg까지 성장해서 그 힘이 굉장히 강합니다. 노인이 만난 '청새치'는 5.5m에 달해 노인의 배보다 커서 이틀 간의 사투 끝에 겨우 붙잡았습니다. 실제 저자인 헤밍웨이는 낚시를 즐기며 평생 청새치 800마리와 참치 200마리를 잡았었습니다.
'노인'은 이러한 '청새치'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이런 모습 속에서 '청새치'는 우리의 목표, 이상향,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84일간 '노인'이 단 한마리의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목표를 이루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노인과 같이 치열한 노력과 끈기를 가졌을 때야,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청새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인의 모습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아등바등하는 우리네 삶과 유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청새치(목표)를 잡는데 성공하지만,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는 노인의 모습 역시, 우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상어'는 인생에서 찾아오는 시련과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상어는 떼로,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때, 노인은 도망가지 않고 상어를 물리치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있게 맞서는 우리 모습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노인은 사자꿈을 3번 꿉니다. 고기를 잡기 전에 한 번, 고기와 사투를 벌이던 도중에 한 번, 그리고 고기를 잡아 돌아왔을 때 한 번.
사자는 동물 중에서도 왕이기에 힘의 상징인데, 반복적인 사자 꿈을 통해 아무리 힘들어도 고기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세번째 사자꿈의 세부적인 묘사는 소설 속에 나오지 않습니다. 단순히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고 묘사만 됩니다. 다만, 세번째 사자 꿈을 꾸기 전에 소년이 "고기가 할아버지를 이긴 건 아니었어요"라고 한 것을 보아, 노인이 비록 상어에게 고기를 모두 빼았겼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운 것 자체가 진정한 승리이고, 나아가 아직도 남아있는 노인의 근성과 남성성, 성취감을 짚어주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노인, 바다, 고기, 상어, 사자꿈이라는 비유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꿈을 꾸고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상어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을지라도 여전히 사자꿈을 꾸고 있고, 고기라는 목표를 향했던 모든 순간이 삶의 여정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저자 헤밍웨이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이고 군인이었습니다.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헤밍웨이는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인으로 참전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실존과 허무를 피부로 체감했습니다. 인간 실존은 한시적이고 덧없는 존재입니다. 결국엔 어떻게든 파괴되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스스로의 삶에 부여하는 단단한 본질마저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헤밍웨이가 노인의 입을 빌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 파괴당할 순 있어도, 패배할 순 없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고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결국 파괴당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삶과 가치를 위해 끝까지 노인처럼 투쟁하고 치열하게 살아나간다면 정신적인 패배는 없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쟁하고 치열해야 하는 삶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가? 

2.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바라보라.

84일이면 거의 3달인데, 그 시간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지만, 노인은 한결같이 바다에 나갑니다.
빈곤과 불운에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나는 미끼를 정확하게 놓는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죄악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나로서는 그보다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다.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이라고 말하며 망망대해를 나서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라고 하며, 거대한 세상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임에도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가지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인은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라 마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 이는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여성형 스페인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젊은 어부들 가운데는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불렀습니다.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하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았기도 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했습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쳐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노인의 마음과 자세처럼 우리는 '바다'라는 넓은 세상을 전쟁터가 아닌 사랑이 가득한 곳이고 희망찬 곳이라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덕분에 노인은 물 밖으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기에 이끌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바다로 나가면서도, 밥도 먹지 못하고 밤낮 헤엄치는 청새치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며, "인간들이 이 고기를 먹을 자격이 있을까? 당당한 자세와 위엄에 찬 이런 멋진 녀석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고기'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고기'와 자신이 함께 헤엄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어부로서 '고기'를 잡아 돈을 벌고, 이웃을 먹여 살리고,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하면서도 '라 마르'의 관점에서 '바다'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인도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혹독한 길에서는 바다와 고기에 대한 사랑을 잃습니다. 바다를 '라 마르'라고 부른 사람 답지 않게 자신의 가치와 본질을 잃는 모습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바다도 때로는 견딜수 없는 '잔혹함'을 가지고 노인을 짓밟습니다. 때로는 고기와 바다가 '엘 마르'로, 때로는 '라 마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모순되게 변화하고 요동치는 우리의 자세를 돌이켜볼 수 있습니다.
노인은 돌아와서 소년에게 "내가 진 것은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잃은 이후였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랑했던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가 변한 것 자체에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간단한 스토리와 문장들로 이뤄져있지만, 읽는 내내 우리가 노인과 같이 낚시줄을 쥐었다가 놨다가 하는 마냥, 손에 땀이 납니다. 이는 삶이 얼마나 치열한 곳이고, 그 치열함 속에 '파괴당할 순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우리의 존엄성이 단순한 스토리 속에서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치열한 삶을 긍정적이고 희망을 가진 자세로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노인을 통해 배웁니다.

왜 제목이 '노인과 고기'가 아니라 '노인과 바다'였을까?
이는 우리의 삶의 목적(고기)도 중요하겠지만, 그 목적을 향해가는 과정과 태도가 나타나는 '바다'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릴적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는 왜 노인이 물고기를 두고 그렇게 사투를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갑니다. 노인이 "물고기를 죽인 것은 돈이나 살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는 자부심을 갖고 물고기를 죽인거야. 무엇보다, 어부니까 죽인거라고"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부의 정체성이 고기를 잡는 것이고, 소명에 가까운 그 행위가 치열할 수록 정체성은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일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해갈 때, 존재론적인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 목표했던 물고기를 잡았지만, 우리는 그 물고기를 지켜야만 합니다.
노인과 같이 우리도 지켜야할 것들도 너무 많아졌습니다. 가족, 재산, 지위, 미래,,, 이제 조금 성취한 것 같은데 아직도 무언가 더 차지하고 지키려는 모습은 마치 상어와 싸우는 노인과 같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는 더 지켜야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투쟁의 끝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노인이 상어에게 패배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상어와 싸우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바다'에 나아가고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생긴 상처와 남아있는 물고기 뼈가 그것들을 증명해줄 것입니다.
노인은 항구에서 집에 오기까지 5번이나 쉴 정도로 힘들었지만, 다시 내일을 꿈꾸며 돗대를 지고 돌아옵니다.

인생은 이런 것입니다.
순간 순간 치열하게, 흔적을 남기며 또 내일을 기약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인이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누구보다 후회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뜨겁게 보내라고, 지칠지는 모르지만 내일을 포기는 하지 말라고 '노인과 바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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