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완벽 요약|내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책
왜 우리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까?
평생을 정신과 의사로 헌신한 모건 스캇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영상 아래에 요약 내용을 기재해 두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서문
이 책은 실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어진 것들입니다.
환자가 자기 자신과 씨름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런 씨름에 실패한 환자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관찰하며 얻은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책의 2가지 전제가 있다면,
첫째,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영혼과 정신의 성숙 과정’이란 복잡하고 험난하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평생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저자인 스캇 펙이 크리스찬처럼 보이지만
책을 쓰던 당시에는 크리스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된 1978년 당시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5년 후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심리치료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하시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당시에는 책 내용이 용감하다는 평이 많았고,
책의 내공 덕분에 점차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 덕분에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총 4부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가 삶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이러한 훈련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우리 삶의 은총들을 기억하며
신의 경지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1부. 훈련
1. 인생은 고통에 직면하는 것
석가모니가 말했듯이 삶은 고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닙니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훈련이 필요하다.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됩니다.
피하려고만 하면,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또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3. 4가지 훈련 방법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생의 고통을 성숙하게 감내하고 훈련하여 성장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4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1)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훈련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짠다는 것입니다.
또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도 있습니다.
삶의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술은
어려서부터 배우기 시작하는데,
부모의 양육 방식이 결정적이고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우리 부모가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함께해 준다면,
고통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도 기꺼이 그 고통을 견뎌 내야겠다”
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훈련의 시작입니다.
2) 책임지는 훈련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삶의 문제를 그때그때 직면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는 것도 내게 달렸다”라고 말할 때야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사람들이 이를 회피합니다.
고통은 따르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책임을 어디에 둘 것인지 평가하고 또 평가해야하는 것입니다.
양육할 때도 아이가 책임을 회피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진실에 충실하는 훈련
진실이란 현실을 말하는데,
현실을 명확히 볼수록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다 나은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지도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도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며 현실을 감수하고 파악하려고 노력 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정확해집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도는 조그맣거나 대강 그려져 있고,
세상에 대한 견해도 협소하고 오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나의 세계관이 정확하다고 확신하면서,
새로운 정보에 대해 흥미도 가지지 않습니다.
지도 제작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정하고 개정하는 과정이 괴롭기에
그 낡은 견해를 끝까지 지키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합니다.
4) 균형을 맞추는 훈련
‘균형 잡기’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련입니다.
복잡한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능력뿐만 아니라,
표출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도 소유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표출할 줄 아는 능력도 가져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려면
상충되는 필요성들, 목적, 의무, 책임, 방향 등을 융통성 있게 균형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열정이나, 경쟁심, 신중함 같은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이나
나의 일부였던 것을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
우울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입니다.
‘중년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보내려면
이전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과 방법들을 포기해야하기에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감당해낼 수 없다면,
옛날 그대로의 생각과 행동에 매달리면서 진정으로 성숙하지 못하게 됩니다.
4. 결론
삶의 훈련 과정을 마치면,
우리는 삶의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이유는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통은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고,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나의 능력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신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 능력 때문에 세상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름에 응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큰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1부를 정리하지만,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
이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4가지 기술이 있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까요?
그 답은 2부에 언급할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2부. 사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유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1.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완전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처럼
다양한 범주로 나누기도 했지만,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이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면,
첫째, 이는 목적론적인 정의입니다. 즉, ‘정신적 성장’이 사랑의 목적인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하나의 순환의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는 사람은 본인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또 이는 다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갑니다.
셋째,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합니다. 나는 인간이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므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넷째,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때라야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라는 단어가 욕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신비한 개념을 갖고 있고,
본질에 대해 혼동합니다.
잘못된 이해가 모든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기에
이제는 ‘사랑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를
3가지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밝혀 보겠습니다.
2. 사랑에 대한 착각
1) 사랑에 빠지는 것과 진짜 사랑을 혼동하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성적인 것과 관련된 일시적인 애욕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황홀한 느낌은 항상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 아닌 이유가 3가지 있다면,
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나. 사랑에 빠지는 일은 한 개인의 한계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북돋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일시적으로 도피가 가능하게 합니다.
개인의 자아 영역의 일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의 자아 영역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나와 사랑하는 그 사람은 하나다. 더 이상 고독은 없다’는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환상도
서로가 자신의 욕망과 취미, 편견, 생활 리듬만 고집하면서,
결국 자아 영역은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2) 의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의존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열심히 돌봐 준다는 확신 없이는,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완전하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의존성’이 우리를 압도하면,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기만을 갈구하며,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3) 사랑은 느낌(애착)이 아니다.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하지만
단순한 애착과 사랑은 4가지 면에서 뚜렷하게 다릅니다.
가. 우리는 생명이나 영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애착을 합니다. 물질, 취미, 애완동물에도 애착하고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 다른 사람에게 애착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정신적인 발전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매번 십대 아들을 직접 운전해주어 등하교시키기를 고집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집착한 것이지 정신적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책임 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낯선 두 사람이 술집에서 만나 애정을 느낄 때, 그들에게는 같이 하룻밤을 보내는 것만이 가장 소중합니다.
라. 애착이란 순간적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 알아봤지만,
이제는 무엇이 사랑인지 6가지로 정의하겠습니다.
3. 사랑이란?
1) 깊이 관심을 갖는 것(노력)
사랑은 자신을 확장시키는 ‘노력’입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려고 애쓰고,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발전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성장을 기원하기에 관심을 갖고,
우리 자신의 의식을 변환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지만 중요한 방법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내가 놓인 사회적 처지가 어떠한가, 내가 상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나의 생각들을 제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상대와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기에 엄청난 노력이 요구됩니다.
양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존중감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됩니다. 아이는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나. 아이들은 자신이 귀중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귀중한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다. 우리는 그 재잘거림 속에서 아이가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만의 특수성도 쉽게 깨닫습니다.
라.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욱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마.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독특한 점을 이해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꺼이 부모 말에 순종하고 부모가 그들을 대했던 것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부모를 대합니다.
2) 용기
우리가 자신을 확대하는 것은 말하자면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애착해야 하는데
이때, 거부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곧 고통이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미지의 것, 결정되지 않은 것,
불완전한 것을 택하기가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거대한 뛰어넘기를 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것과 용기, 사랑은 3가지 측면에서 큰 관련이 있습니다.
가. 성장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킬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사랑해주고 존중해준 부모님 덕분에 충만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자신의 심리적 독립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만이 정신적인 성장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랑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3) 두터운 책임감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는 언제나 책임감이 내재해 있습니다.
책임감이 많다고 해서 꼭 성공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책임 의식이 생겨나지 않는 관계는 부서지기 쉽고 장기적으로 약화됩니다.
4) 바로 보도록 일깨우는 것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도록 일깨워 주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내가 옳고, 네가 잘못했다”라고 접근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책 없이 비판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가 상대방보다 더 우수한 지식과 지혜를 가질 수 있지만,
상대의 삶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과
그 삶에 대해 충고해 주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상대의 선택이 오히려 현명한 게 아닌지,
나의 편견으로 인해 내 인식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계속해서 자문해야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참을성 있고 사려 싶게,
그러나 활발하게 아이들이 진실에 직면하도록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바로 보게 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결혼 관계가 상대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려면
서로가 지속적으로 바로 봐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최선의 비판자가 되어야 참으로 성공한 결혼입니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갈등이 없는 관계가 좋은 게 아니라, 애
정을 갖고 상대방이 진실에 맞서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5) 훈련되는 것
우리가 참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의 행동을 교정하도록 훈련하고,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 최대로 이바지 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우리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6) 독립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한 독립적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독립성과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촉진시킵니다.
독립성이 부족한 부모는 감정적인 면에서
아이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 개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그들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관리할지 곤란을 겪습니다.
이를 칼릴 지브란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이다...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줄지라도, 당신의 생각을 줄 수는 없다...
당신은 그들을 애써 닮으려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된다...”
저자인 스캇펙은 자신의 아내의 목적과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그녀가 가진 목적은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것이며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독립성을 길러 주려고 애씁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이나 사회는 이러한 개인의 여행을 지지해 주려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결혼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마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마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마라.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계 속으로는 침범하지 마라...
지금까지 1부의 훈련이 방금 2부에서 말한 사랑을 토대로 해서 발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또한 사랑의 결핍이 정신병의 주요 원인이 되고,
사랑이 정신 치료에 기초적인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끊임없이 버림당했는데도
정신 치료 없이도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 더 어려운 차원의 사랑도 존재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통찰력을 얻기 위해 3부-4부부터는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3부. 성장과 종교
1. 세계관이 곧 종교다.
사람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훈련, 사랑, 생활의 경험들을 통해 성장하고,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이해하며 성장합니다.
반대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해의 폭과 세련됨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편차가 생기는데,
이러한 이해가 곧 우리의 종교입니다.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 대한 이해(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니,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신을 섬기고 예배를 가지는 것만 종교는 아닌 것입니다.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종교)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문화이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가족입니다.
부모의 성격이 하느님에 대한 성격에 투사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면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을 믿고,
반대이면 처벌하는 하느님 개념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역할에 부합되는 종교와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고 더 넒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해 범위를 확대시켜야 합니다.
1부에서 얘기한 지도를 수정해 가는 비유처럼 말입니다.
2. 과학도 종교다
정신적 성장이라는 것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해 보다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이전의 경험들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에서 탈피해 인식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종교로써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정확한 고찰을 위해 조사/지식/의심/경험 등의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제 종교로서의 과학은 다른 많은 세계관을 능가하는 도약을 이뤄냈습니다.
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갖는 회의적인 세계관은
맹진/미신/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기초를 둔 세계관보다는 발전됐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이제 막 정신적 성장을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의 견해는
마치 자기 조상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농부의 견해만큼이나 편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정말 우리가 버려야할 원시적이고 어린애 같은 것이 아니고, 정신병의 한 유형도 아닙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정신병의 원인이 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이 독이 되고, 어떤 사랑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회의할 때 2가지 함정에 빠집니다.
1)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내버리는 것
하느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더러운 목욕물이 있습니다.
성전, 종교 재판, 동물 제물, 인간 제물, 미신, 파문, 교리주의, 무지, 위선, 독선, 잔인, 공포, 복종, 병적인 죄의식 등.
그런데 생각해 봐야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한 것인지,
인간이 하느님에게 저지른 것인지 봐야 합니다.
2)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는 것
많은 과학자들이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론적으로 과학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과학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회의하는 과학적 태도가 필요하지만,
과학 자체가 우상이 되지 않도록 과학에 대해서도 회의적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의적인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기 자장, 양자 이론, 상대성 이론 같은 것들을 통해
현실이 역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이러한 패러독스를 깨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종교와 과학의 통합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인들과 과학자들은 스스로가 만든 좁은 틀 속에 머물러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종교와 과학은 너무 상이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이라고 하면 너무 극적인 것만 연상합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로부터 내리치는 소리를 찾기만,
사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 순간의 사건들이 기적의 증거이고 은총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4부. 은총
1. 삶 자체가 은총이다.
1) 건강이라는 기적
정신과 의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환자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의학적 통계로는 어떤 정신적 외상을 받으면 노이로제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왜 정신질환에 빠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이겨 내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서
그 힘이 최악의 환경에 처한 대다수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지키고 유지시킨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대해 의사들이 저항과 면역 체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몸의 방어 체계가 실패한다는 것보다,
어떻게 제대로 가동되는 것이 보편적인지,
훨씬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연 법칙과 관습적인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인간 정신의 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무의식이라는 기적
숨겨진 마음의 존재와 그 풍요로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꿈’입니다.
무의식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깨어 있을 때도 유효하고 적절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자유연상’처럼 스쳐가는 단편적인 생각도 그 중의 한 종류입니다.
또한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무의식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실제와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 믿고 있는 것보다 좀 낫거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발달 과정에서 주된 과제는 우리가 의식하는 자기의 개념을 실제와 일치시켜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겉보기보다 훨씬 현명한 우리 내부의 무의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융은 집단 무의식 이론을 말하며 우리의 지혜가 유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상 앞에 경외의 심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파고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질서를 사색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을 없다고 믿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3) 일상에서의 기적
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친구와 같은 꿈을 꾼다던가,
교통사고로 박살난 차에서 다치지 않고 나오는 일들도 생깁니다.
이러한 기적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다만 기적이란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은총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딱히 추구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능력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냥 지나치고 이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2. 은총이란 무엇인가?
정리하자면 삶에는 여러 기적 같은 현상들이 있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1) 이것은 인간의 삶과 영적 성장을 이끌고, 보호하고 육성한다.
2) 이것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어렵지만 신체의 면역이나 꿈으로 나오고, 과학적으로는 불합리해 보인다.
3) 인간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뿐 아니라 본질적이다.
4)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받지만, 그 근원은 의식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고 의식적 의사 결정을 초월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에 의해 성장합니다.
모든 생명의 성장 과정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개념화하기 훨씬 전부터
이 힘은 종교에 의해서 인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와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적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떤 힘(기적)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적을 ‘진화’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3. 은총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진화 역시 은총이다.
영적인 성숙은 곧 개인의 진화입니다.
육체는 생명 주기에 따라 변화는 하지만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일생 동안 계속해서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미개한 정신에서 영적 정신으로 거듭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힘겹고 어려운 것인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적인 기적은 이 저항을 극복해 냅니다.
우리는 성장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식은 인류 전체에도 적용됩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몇 세기 전만해도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자녀의 정신적 성장, 부모가 가져야할 책임감에 대해 생각도 안했었습니다.
그러면 이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이 힘에 대해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랑’이라고,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북돋워 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도’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영적 성장을 돕는,
진화라고 하는 전능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2) 진화(은총)의 힘은 신으로부터 온다.
이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답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근원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추측하고 이론화하고, 가정과 가설을 세울 뿐입니다.
진화와 은총의 기적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의 존재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성숙하기를 원하며 우리를 사랑한다는 가설은,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단순하다 해도,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질문을 던져 본 사람이라도
이보다 나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3) 진화(은총)의 목적은 신이 되는 것
사랑하는 능력, 성장하고 진화하려는 열망이 하느님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가정하면,
곧이어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일까를 묻게 됩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성장하는 것인가?
진화의 마지막은 어디인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면 결국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릅니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게 되는 일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입니다.
4. 진화를 막는 것
1) 게으름
하느님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관념은 우리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웁니다.
이를 믿는 즉시 우리가 할 수 있는 끝없는 노력을 통해 죽는 순간까지 성장에 게을러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바쳐야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 볼 의무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인간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면,
영적 성장이나 의식 수준을 높이거나,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주어진 인간으로 지내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우리가 성장하여 자신과 같이 되도록
능동적으로 우리를 돕고 잇다는 생각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직시하도록 합니다.
게으름만 극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장애물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게으름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1부 ‘훈련’에서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고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2부 ‘사랑’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자아의 경계를 확장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영혼의 성숙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 4부에서 게으름은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게으름은 세상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속에도 새로운 학문, 책임, 성숙의 영역으로 나 자신을 확대해 가는 데 있어서
게으름과 유사한 머뭇거림이 있습니다.
2) 게으름의 형태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심리 치료에서도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시작하고서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채 그만둡니다.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인데,
자신이 처한 고충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력보다,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3) 악
그런 점에서 악은 실제 존재하는데,
악이란 게으름이 극한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게으름인데,
평범하게 게으른 사람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정말 악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엔트로피의 힘 사이에서 비교적 균형을 잘 유지하기 때문이고,
악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넓게 퍼져 있는 악과의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한 방법입니다.
5.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1) 정신적 발전은 의식의 성장이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은 영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잣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종교나 세계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향과 편견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훈련과 사랑에 집중하면서 세상과 사랑하는 것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적 발전은 곧 의식의 성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의식 conscious는 말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con과
‘안다’라는 뜻의 scire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의식한다는 것은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함께 안다는 것인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아는 것입니다.
'인식'이란 '의식'을 '무의식'과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2) 영적 성장의 목표 = 신
그런데 또 우리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무의식은 모든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어떤 과학적 답변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의 존재를 가설로 새울 뿐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입니다.
지금의 자신보다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즉,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난 의식의 새싹이 신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입니다.
3) 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
하느님에 가까운 자아가 될 수 있도록 성숙한 의식적 자아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것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해 새롭고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됩니다.
의식적 결정을 통해 이 세상이 신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 삶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한 모습으로,
인간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사랑 없던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인류 자체의 진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6. 왜 극소수만이 은총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까?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하고 인생의 전문가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을 가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가 그들에게만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체, 하느님의 것임을 인식합니다.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자기 의식의 축소를 경험합니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왜 극소수만이 은총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까요?
여기에는 4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영적 권력의 무게
그러나 영적 권능을 경험하는 것은 즐겁기도 하지만,
2가지 측면에서 힘든 일입니다.
가. 인식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하고 또 소화해 내야 합니다. 영적 권력이란 단순한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심오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능력입니다.
나. 고독입니다. 자기 위에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나 비난할 사람,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와 대등할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본인을 이해할 제자가 없었습니다.
2) 책임회피
정신 질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불쾌한 사실들을 우리 의식 밖으로 몰아내면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를 ‘방어 기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방어 기제로 인해 사람들은 정신 질환자들을 ‘뭘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무의식은 악몽이나 불안, 우울증, 기타 증후군을 통해 경고합니다.
이러한 증후군은 병이 아니라 치료의 단서인데,
많은 사람들이 은총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선물을 거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을 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사하고, 특정 행동은 하지 않거나, 약물, 마약에 손을 댑니다.
때로는 증후군에 대해 인정할 때조차도 교묘하게 바깥 세상에 책임을 전가합니다.
3) 성장 의지
성장 의지는 어린 시절의 부모 사랑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인 은총에 의해서도 자라납니다.
이 은총은 우리의 의식 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대리자를 통해 작용하고,
부모 외에도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옵니다.
4) 게으름 & 두려움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지만,
우리 대부분이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며, 게으릅니다.
우리에게 저주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로 지금의 편안한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은총에의 부름은 책임과 권력이 있는 지위로 승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는 커다란 의무를 지는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으로의 부름이고,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으로의 부름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 이유는
힘을 남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근면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외에 탓할 사람이 없는 권력의 정상에 올라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고독한 선장이 되기보다는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는 어른으로서의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기쁘다’라는 것보다
‘제기랄’이라는 반응을 더 많이 합니다.
‘부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 받은 자는 적다’는 말은 은총에의 부름에 응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7. 은총을 맞이하는 법
1) 은총은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영적인 성장이 질서 정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노력과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냥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은총을 차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찾으려 애쓰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우리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선택은 하느님이 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선사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상황에 무척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자기가 찾아 얻은 것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2) 그러나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은총이 기적적으로 올 때 자신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옥한 땅,
은총을 환영하는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도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지만,
사실 이전에 16년 동안 이를 찾아 헤맨 시간이 있었습니다.
은총의 축복을 받은 것은 찾아 헤매면서도
또 전혀 찾지 않는다는 역설이 교묘히 배합되어 있습니다.
의식적 의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과 지혜를 따라 훨씬 정확하게 바른 길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고서도 은총의 축복을 받는 방법은,
이것이 그저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의지의 영역 너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선물)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성장의 여행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과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해내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게 안내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안내되면 여행은 훨씬 더 빨라집니다.
8. 홀로 가야 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걸음걸이가 안전하고 가치 있다고 보장되기를 원하나,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 및 행동의 독립성을 요구합니다.
어떤 스승도 우리를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확고한 공식도 없기에 우리는 좌절하기 쉽지만,
일단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의미 없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이해 방식을 없어집니다.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힘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은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이 실존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신의 의지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다는 최고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느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우주의 길 잃은 미아가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도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따뜻하게 맞아들여짐을 압니다.
더 이상 우리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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